믿음에 대하여

믿음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다

지식적인 부분이 아닐 뿐아니라

알아서 되는 부분이기 보다는

직접 체험하고 느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가 말하는 믿음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닌듯 보인다.

세상가운데서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은 같은 뿌리에서 시작했으나 결국 달랐다

그 믿음으로 인해서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정죄하기도 했다

 

믿음은 때로는 우리의 결정적인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게도 만든다.

그래서 믿음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우상적이기 쉽다.

무엇이 믿음인가?

무엇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가?

 

우리가 우리의 일상을 위해 성공을 위해 자신의 뜻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믿음의 뿌리를 그곳에 두게되면

하늘의 은혜와 응답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뿐만아니라 그 응답으로 인해

우리는 시험에 들게된다.

하나님을 믿고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래서 오늘 내가 원하던 직장이나 학교에 턱 하니 붙는것이

나의 믿음으로 인한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믿음을 믿는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권능의 팔을 믿은 것인가?

그로인해 나는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맛보았는가?

아니면

아직 제자리인가? 갈증과 고민이 그대로 인가?

 

우리의 믿음이 땅에 있는 것들이라면

모든 믿음은 땅에 대한 것이며 그 길이 믿음을 완성하는 길일까?

 

믿음은 결국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만 주어진 하늘의 언어이다.

하지만 그 기준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믿고 그렇게 가르친다.

문제는 의로은 그가 왜 다시 실수와 잘못과 그리고 회계를 반복해야 하는가 이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인가?

우리의 믿음이 가득차면 과연 죄와 실수가 우리의 인생에 없을까?

 

다윗 또한 성경의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부하장수인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는 죄를 지었다.

도덕적으로 얼마나 치명적이고 죄질이 나쁜가!

살인교사에 간음에 증거인멸까지

오늘날 현대의 법은 그를 종신형에서 구해내지 못할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고

하나님께서 인정한 믿음의 자손이었다.

 

그의 믿음에는 무엇이 다를까?

 

세상의 가르침은 참 어렵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반복한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교회의 일이나 행사에 또는 선교에 참여하지않는다고 한다.

기도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다시 말한다. 

이 말은 무슨뜻일까? 행위의 양에 믿음의 기준을 두라는 뜻일까?

세상의 가르침은 참 어렵고 훼괘망칙하다.

 

믿음 자체는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믿음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믿음은 그냥 기능에 불과한 부속장치인 것이다.

우리의 희망하는 일 대부분은 우리의 믿음만으로도 이루어 질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이란 모두가 공평하게 가지고 있는 기본 권리이자 하늘이 주신 공평한 추이지

개인마다 무게가 달리 나가는 척도가 아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믿음을

잘못 사용하여 왔다는데 있다

그래서 우상도 만들고

그래서 악한 행위가 믿음으로 정당화 되고

그래서 유태인을 살륙하고 그 정당성까지 가진다고 외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보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다고 정당화 한다.

 

언제부터 믿음이 자신을 정당화 하는 판단의 기준이되고 타인에 대한 정죄의 수단이 되었단 말인가?

그 믿음으로 지금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은 왜 체험하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유일한 “세상의 의”라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정당함과 의로움과 정의에 대하여 이 세상에서 말할 수 있는 오직 한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기만 해도 된다.

 

우리가 예수의 피값으로 깨끗케 되었다고 우리가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과 예수그리스도께서만이 의로움에 대하여

사람의 의에 대하여 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변호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이 스스로를 정당화 하는것이 결코아니다.

 

그것이 믿음의 실체이다.

 

그 분이

이 사람은 내가 나의 피값으로 산 자입니다라고

그 분이 우리를 변호하실 수있는 유일한 분이시지

우리나 우리의 믿음 자체는 그러한 능력과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깨끗함을 알지못하고 논할 자격도 없다.

특히 하늘의 영원성을 가진 세계에서는

그곳에서 이미 추방되었고

믿음을 실격당한 우리이기에

대리자 또는 우리를 변호할 자가 없이는

하늘에 항의를 할 수 조차 없는 것이다.

또한 하늘에 도움을 받을 수 조차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율법앞에서 법 앞에서 

법관에 의해 우리가 서게되지만

 

세상의 법정이 아닌 하늘에서는

그 변호자가 바로 우리 앞에 죄 대신 서셔서

변호하시기위해 죄값을 모두 치르시고

변호의 권리와 함께 영원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심판의 전권이 그 분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그러한 예수님의 권위와 존재를 믿는 얕은 지식과 얕은 믿음만으로도

그것으로 인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이

하늘에서 보시기에 

믿음없고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그것만으로도 의롭게 보아주시고 여겨 주신다는 것이지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월권적 해석이다.

 

현세계에서는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신분을 가진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세상에 인간으로 계셨지만

그 분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시며

우리와 신분자체가 틀리신 분이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 의에 대하여 알고계시며

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것이다.

 

그래서 흠없는 그가

흠있는 우리를 대신한 것이다.

 

흠이 있는 인간이 흠이 있는 양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없기에

하늘에서 직접 하늘의 흠없는 양을

세상으로 공수하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규율과 예법을 따라

구원을 약속을

인간을 위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세상에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인간이 이해할 수있는 방법으로

입증하신 사건이다.

 

우리의 믿음은 사랑의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과

그 나라에 대하여 감사하고

영원성의 실재와 신혼잔치의 약속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는 즐거움에서 체험하게된다.

 

우리의 소망은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하늘에서 내리신 은혜의 방식이다.

그 은혜가 귀한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즐거워하는 즐거움이다.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믿음의 기준이 되어야 하며

모든 소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준안에서

기다리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되고

무엇으로 인정받고

무엇을 가지고자하는

소유의 믿음보다

영원한 즐거움을 반드시 주실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자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고백하게되면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죄진 다른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의로움을 논할 자격이 없으며

의의 권리도 없는 자이기 때문에

나도 남을 나처럼 용서해야 되며

 나 또한 하나님으로 부터 그와같이 용서를 받아야 할 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하나남의 나라는

그렇게 일하게 되어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일하게 하는

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를 덮치는

은혜의

공간에 우리를 세우시는 힘이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의를 믿음으로 주장하면

또한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하여 주장하면

결국 하늘은

그 의의 일을 하지 못하고

우리의 의 안에서

뒤틀려 있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복을

체험하는 길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의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만이

모든 의를 분별하는 기준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으로 받아들여질때

그리고 그 분의 인생의 권위를 인정할때

나는 그 분앞에 죄인으로

용서받을 기회가 생긴다.

은혜와 평강을 체험할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믿음은

회계의 또 다른 모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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