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에있어서
우리의 삶을 속이는
거짓이라는 적이 있음을 말해왔다.
그 적이 실은 내가 아니며
나를 가장한 거짓 의식인것도 말해왔다.
이 거짓의식은 우리를 묶는데
그 묶는 방법은 과거의 사건과 상처를 통해서 묶는다.
이 사건과 상처는 실은 열려있는 우리 의식에서 지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적들은 지나간 사건 뒤에 그 사건의 상처를 열등감으로 무의식에 가둔다.
이렇게 우리의 무의식에서 묶인 거짓 의식은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거짓을 찾아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적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우리마음에 경험하지 못한 편안함이 찾아오게된다.
만약 나의 상태가 평안함과 거리가 있다면
항상 긴장상태이며
성공했음에도 행복감을 못느낀다던지
누군가를 미워한다던지
일이 풀리지 않을때 누구를 원망하고 싶다던지
상황이 나빠지면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 또한
나의 무의식에 적이 뿌린 거짓의 씨가 있음을 의미한다.
건강한 사람들은 이러한 무의식을 의식에서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상황이 겹치며서 부정적인 생각에 들어가면
이 무능한 의식이 현실 의식에서 힘을 발하게된다.
우리가 그의식을 먹이게 된다는 것이다.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닫혀진 무의식에 묶인 자아는
더 강하게 묶이게 되는데
이것이 적들의 계책이다.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을 통해서 보면
적은 혀로 우리의 마음을 먼저 속이는데
그 첫번째 것이
우리를 위하는 말 같지만 실은 우리의 권리를 하나님으로 부터 빼앗기위한 이간질이었다.
그리고 그 것이 하나의 사건이 되자
이제 인류의 의식속에 하나님에 대한 불법의 의식을 처음으로 심게되는데
이것이 세상에 들어와서 힘을 발하게된 통로가 된 것이다.
이것이 죄이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있던지
아니면 비난의 생각을 품으면
바로 그렇게 만든 마음이
바로 우리의 적들인것을 알면된다.
우리의 무의식이 적들의 침투를 아직
허용하고있기 때문이다.
적들이 우리의
성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통로를 어딘가에 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사건 또는 상처 인데
그 치유되지 못한 통로를 따라서
적들이 넘나드는 것이다.
상처의 사건과 기억은 실은 우리의 삶의 자산인데
어린아이처럼 우리의 의식이 자라지 못하게 하여
성숙한 삶으로의 소화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열등감의 의식을 내면에 심어서 인생의 또다른 사건으로 들어나도록
적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처와 사건의 기억은
적들이 사건을 통해서 묶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무의식에 남긴것이다.
그 무의식은 우리를 남을 향하여 본능적으로 흥분하게
또는 적대적이게 또는 비난하게 또는 두려움과 괴로웁게 만든다.
의식에서 무의식에서와 같이 완전히 묶으려는 것이다.
저주의 묶임이 이와같다.
이와같이 묶이면
항상 남을 비난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채우게 된다.
그리고 남들 앞에서 또는 혼자서
저주와 같은 비난과 저주의 말들을 뱉어내게 만든다.
이러한 상태는 그 사람이 저주에 묶임을 당한것이다.
실재로 그 저주의말은 나와 상대모두에게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을 통해서
적들은 우리를통해 세상에 존재한다.
비난의 말을 하게 만드는 적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알기만해도 묶임은 풀린다.
중요한 것은
이 의식이 실은 거짓이며
우리가 입으로 예수님께 향하여 기도를 할 수 있다면
묶인 무의식도 차츰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것이다.
그 통로를 막으면 나의 정원과 같은 내마음의 성에 들어온
여우를 잡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 간사한 여우를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묶이라고
명할 수 있게되며 나가서 돌아오지 말라고 명할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문제가
당신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 때문에 나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괜찮다고
실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스스로 말 할 수 있어야 한다.